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무스타르시드 (문단 편집) === 2차 거병 (1132-35년) === 셀주크 내전이 막 시작되던 1132년 3월 27일, 바그다드의 쿠트바 (금요 예배문)에선 산자르를 비롯한 셀주크 왕가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파티마 조가 바그다드를 장악했던 1058년 이후 처음 있는 일로, 알 무스타르시드의 확고한 자립 의지가 투영된 것이었다. 이후 그는 힐라를 점령하는 등 이라크 중부에 대한 정복에 나섰다. 그해 5월, 마수드는 형 마흐무드와 마찬가지로 산자르에게 패하고 그에게 복속하여 아제르바이잔 총독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6월, 마수드는 모술의 장기에게 칼리파 군을 격파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응답한 장기가 남하하여 8월 무렵 칼리파 군과 대치하였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성유물로 전해지던 사도 무함마드의 옷을 걸치고 전투에 임하는 술책--치트키--을 사용하였고, 이는 그대로 먹혀들어 장기의 무슬림 병사들이 싸움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대패를 당한 후 추격을 당하던 장기가 [[티크리트]]에 이르러 태수 아이유브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그해 12월, 셀주크 내전에서 마흐무드의 아들인 술탄 다우드는 토그릴에게 패하여 아제르바이잔을 잃고 마수드와 함께 바그다드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1133년 1월, 마수드는 알 무스타르시드로부터 술탄으로 책봉받았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후 다우드와 마수드는 칼리파 군대와 북상하여 5월 토그릴을 격파하고 하마단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그 직후 마수드는 칼리파 측과 단절하고 하마단에서 자립해버렸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그대로 자신에게 남은 다우드와 패배한 토그릴과 연합해 북상, 7월 26일에 마수드와 동맹한 장기의 모술을 포위하였다. 다만 8일간의 포위 끝에 칼리파 군은 마수드의 원군이 당도하자 후퇴하였다. 이후 마수드는 하마단, 다우드는 [[하산케이프]]에서 공존하게 되었다. 1134년 4월, 장기는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와 연합해 하산케이프를 공격하였다. 그해 6월엔 마수드가 토그릴에게 하마단을 잃고 재차 바그다드로 피신해왔다. 알 무스타르시드는 배신한 전적이 있는 마수드를 탐탁치 않게 여겼고, 1134년 10월 그를 바그다드에서 추방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불과 9일만에 토그릴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마수드는 재빨리 주인 없는 하마단을 접수하며 세력을 회복하였다. 이로써 알 무스타르시드와 마수드 간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는데, 장기는 아들에게 모술의 열쇠를 주어 전자에게 보내며 술탄 대신 칼리파 측으로 전향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장기는 이라크 대신 다마스쿠스 원정에 나서며 사실상 중립을 지켰다. 다만 칼리파의 사절이 당도하여 다마스쿠스의 독립을 존중해 달라는 뜻을 전하자 부리 왕조의 복속과 볼모를 대가로 철군하였다. (1135년 3월)] 마수드에게는 대신 칼리파 측에 본거지 힐라를 빼앗긴 베두인 부족장 두바이스가 새로운 동맹으로 가담하였다. 1135년 5월, 칼리파 측의 모술-바스라 연합군이 두바이스와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러자 바스라 총독 베그 아바는 비밀리에 마수드 측으로 전향하였다. 이를 모르던 알 무스타르시드는 와지르의 반대에도 5월 25일 바그다드를 출정하였다. 술탄 마수드 역시 셀주크 왕가에 충성하는 제후들을 모두 소집하였다. 술탄과 칼리파의 정면 충돌은 이슬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